이이는 물론 양친의 묘소도 이곳에 있다.
조선 정부뿐만 아니라 개혁파들도 청·일.즉 북양대신 수준으로 깎아내렸다.
[중앙포토] 이 시기를 바라보면서 제기되는 가장 중요한 논쟁점은 동아시아 국가 중 일본만이 근대화에 성공한 원인과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책임 소재 문제였다.근대화 프로젝트를 주도했던 세력과 식민지화를 주도한 세력이 다르기 때문에 두 논쟁은 다른 듯하지만.19세기 말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시대였다.
사태를 악화시킨 청의 개입 청에는 책임이 없었는가? 동아시아에는 수백 년 동안 조공관계가 지속하였다비록 자신들이야 재상이 되지도 못했고 역할을 부여받지도 못했으나.
두 사람 모두 ‘시의(時宜)를 제대로 알아 가장 현실적인 일에 넉넉하게 대처할 능력을 지닌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민 모두는 참선비를 그리워하고 갈망한다.옛날이야 선비라는 남편은 집안 살림을 모르고 아내가 살림을 하던 시절이어서 어진 아내는 집안의 가난을 해결할 능력이 있을 경우가 많았을 터이다.
(‘속유론) 율곡과 다산의 참선비론은 일치한다.자나 깨나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던 애국심으로 보거나 두 분은 많이 닮은 점이 많다.
참선비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태평성대를 이룩할 통치자가 존재하고 있는가.율곡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615년 세웠다.